루키우스 율리우스 우르수스 세르비아누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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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루키우스 율리우스 우르수스 세르비아누스는 로마 제국의 원로원 의원이자 트라야누스와 하드리아누스 황제 시대의 유력 인물이었다. 그는 게르마니아 인페리오르와 판노니아의 총독을 역임하고 다키아 전쟁에서 중요한 군사 지휘권을 맡았으며, 두 차례 집정관을 지냈다. 하드리아누스 황제는 처음에는 세르비아누스를 후계자로 고려했지만, 말년에 생각을 바꿔 그의 손자를 후계자로 삼으려 했다. 그러나 하드리아누스가 루키우스 아일리우스 카이사르를 입양하자 세르비아누스는 이에 반발했고, 하드리아누스는 계승 분쟁을 피하기 위해 그와 손자의 사형을 명령했다. 세르비아누스는 뛰어난 행정가이자 군사 지도자였지만, 황제 계승을 둘러싼 권력 투쟁의 희생양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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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키우스 율리우스 우르수스 세르비아누스 | |
---|---|
기본 정보 | |
이름 | 루키우스 율리우스 우르수스 세르비아누스 |
로마자 표기 | Lūcius Iūlius Ursus Serviānus |
출생 | 서기 45년 |
사망 | 서기 136년 |
직업 | 로마 제국의 군인 및 정치인 |
경력 | |
원로원 의원 | 기원전 90년 |
보좌 집정관 | 90년, 97년, 98년 |
집정관 | 90년, 97년, 98년 |
로마 총독 | 판노니아 (97년 ~ 99년) |
시리아 총독 | 117년 ~ 119년 |
가족 관계 | |
아버지 | 루키우스 율리우스 우르수스 |
어머니 | 미상 |
배우자 | 도미티아 파울리나 |
자녀 | 율리아 세르비아나 (양녀) |
친척 | 하드리아누스 (사촌) |
2. 생애
로널드 사임의 주장에 따르면, 세르비아누스는 원래 '세르비우스 율리우스 세르비아누스'라는 이름을 가졌으나 루키우스 율리우스 우르수스에게 입양되면서 이름을 바꾸었다고 한다.[9] 세르비아누스는 트라야누스 황제 즉위 이전에 하드리아누스의 누이 아일리아 도미티아 파울리나와 혼인하여 딸 율리아 세르비아나 파울리나를 두었다.
세르비아누스는 트라야누스와 하드리아누스 두 황제 치세에 걸쳐 세 차례나 집정관을 역임할 정도로 정치적으로 영향력 있는 인물이었다. 그는 소플리니우스와 친구 관계였으며, 트라야누스에게 소플리니우스에게 혜택을 줄 것을 요청하기도 했다.[12]
2. 1. 초기 경력
로널드 사임은 그가 90년에 보좌 집정관이었을 때 원래 이름이 '''세르비우스 율리우스 세르비아누스'''였고, 그 이후에 루키우스 율리우스 우르수스가 그를 입양하며 이름을 바꾸도록 했다고 주장하였다. 어느 학자들도 이 의견에 대해 반대되는 의견을 말하지 않으며, 만장일치로 받아들여지는 것으로 여겨진다.[9] 98년 트라야누스 황제 즉위 이전에, 세르비아누스는 자신보다 세 살 어렸던, 30살의 하드리아누스의 누이 아일리아 도미티아 파울리나와 혼인했다. 트라야누스 치세 (98년 ~ 117년)에, 파울리나와 세르비아누스는 율리아 세르비아나 파울리나라는 딸을 두었다.98년 1월 27일 네르바가 사망했을 때, 하드리아누스는 트라야누스를 찾아 네르바의 죽음을 알리기 위해 독일로 향했다. 세르비아누스는 트라야누스가 하드리아누스에게 보인 호의를 질투하였기에 하드리아누스의 독일행을 막으려 했지만 실패했다. 그럼에도, 세르비아누스와 하드리아누스는 화해하였고 좋은 사이로 오랜 기간 있었다.
2. 2. 트라야누스 시대
세르비아누스는 97년부터 99년까지 게르마니아 인페리오르 총독을 역임했다.[10] 그 직후, 99년부터 100년까지 판노니아 총독으로 임명되어[11] 다키아 전쟁에서 중요한 군 지휘권을 맡았다. 102년에는 두 번째 집정관 직을 수행했다.세르비아누스는 원로원 의원이자 역사가였던 소플리니우스와 친구 사이였다. 플리니우스는 그에게 편지 두 통을 보냈으며, 자신의 편지에서 그를 두 차례 이상 언급했다.[12]
2. 3. 하드리아누스 시대
트라야누스가 117년 8월 8일에 사망하자, 그의 친척이자 양아들이었던 하드리아누스가 황제가 되었다. 하드리아누스는 황제 시절에 세르비아누스를 자신의 제일 가는 후임자로 여기며 특별한 예우로 대우했다.[14] 130년에 세르비아누스의 아내 파울리나가 사망하자, 하드리아누스와 세르비아누스는 그녀를 위한 개인적인 장례를 함께 치렀다.오랫동안 하드리아누스 황제는 세르비아누스를 자신의 비공식적인 후계자로 여겼다. 하지만 하드리아누스의 치세가 끝에 다다르면서, 그는 생각을 바꾸었다. 하드리아누스는 분명히 자신이 사망한 후에 세르비아누스가 황제로서 통치를 할 수 있는 인물이라 생각했지만, 당시에 90대였던 세르비아누스는 황제로서는 너무 나이가 많았다. 하드리아누스의 관심은 루키우스 페다니우스 푸스쿠스 살리나토르라는 이름의 세르비아누스의 손자에게로 향했다. 그는 자신의 조카의 자녀였던 젊은 살리나토르의 뒤를 봐주었고, 궁정 내에서 특별한 지위를 내려주었으며, 후계자로서 그를 교육시켰다. 자신의 손자가 언젠가는 처남의 뒤를 이을 것이란 생각을 간직하던 세르비아누스는 매우 기뻐했다.
그러나 136년에 하드리아누스는 마음을 바꾸고 루키우스 아일리우스 카이사르를 아들이자 후임자로 입양하기로 결정했다. 세르비아누스와 어린 살리나토르는 하드리아누스에 대해 분노했고 입양에 대해서 그에게 맞서려고 하였다. 살리나토르는 세르비아누스가 연루된 하드리아누스에 대한 쿠데타를 시도했을 가능성이 있다. 계승에서 잠재적 분쟁을 피하기 위해, 하드리아누스는 살리나토르와 세르비아누스의 사형을 명령했다.[14] 아이러니하게도, 아일리우스는 138년에 하드리아누스보다 앞서 사망했고, 하드리아누스가 안토니누스 피우스를 입양하게끔 했다.
세르비아누스는 134년에 하드리아누스 치세에서 집정관을 역임하였다.
2. 4. 몰락과 죽음
하드리아누스 황제는 오랫동안 세르비아누스를 자신의 비공식적인 후임자로 여겼다. 그러나 하드리아누스의 치세가 끝날 무렵, 그는 생각을 바꾸었다. 하드리아누스는 세르비아누스가 자신이 사망한 후에 황제로서 통치할 수 있는 인물이라고 생각했지만, 당시 90대였던 세르비아누스는 황제로서는 너무 나이가 많았다. 하드리아누스는 세르비아누스의 손자인 루키우스 페다니우스 푸스쿠스 살리나토르에게 관심을 돌렸다. 그는 자신의 조카의 자녀였던 젊은 살리나토르를 후계자로 교육시키고, 궁정 내에서 특별한 지위를 주었다. 세르비아누스는 자신의 손자가 언젠가 자신의 뒤를 이을 것이라는 생각에 매우 기뻐했다.[14]그러나 136년, 하드리아누스는 루키우스 아일리우스 카이사르를 아들이자 후임자로 입양하기로 결정했다. 세르비아누스와 어린 살리나토르는 이에 분노하여 하드리아누스에게 맞서려 했다. 살리나토르는 세르비아누스가 연루된 쿠데타를 시도했을 가능성이 있다. 하드리아누스는 계승 과정에서 발생할 수 있는 잠재적 분쟁을 피하고자 살리나토르와 세르비아누스의 사형을 명령했다.[14] 아이러니하게도 아일리우스는 138년에 하드리아누스보다 먼저 사망했고, 하드리아누스는 안토니누스 피우스를 입양하게 되었다.
3. 평가
세르비아누스는 뛰어난 행정가이자 군사 지도자였다. 그는 트라야누스 황제와 하드리아누스 황제 시대에 걸쳐 중요한 역할을 수행했다. 특히 트라야누스 황제 치하에서 게르마니아 인페리오르와 판노니아 총독을 역임하며 다키아 전쟁에서 중요한 군사 지휘권을 맡았다.[3][4] 또한 그는 원로원 의원으로서도 영향력이 컸으며, 대 플리니우스와 같은 저명한 인사와도 친분을 유지했다.[5]
그러나 세르비아누스는 황제 계승을 둘러싼 권력 투쟁의 희생양이 되었다. 하드리아누스는 처음에 세르비아누스를 자신의 후계자로 고려했지만, 나이가 많다는 이유로 마음을 바꿨다.[7] 이후 하드리아누스는 세르비아누스의 손자인 루키우스 페다니우스 푸스쿠스 살리나토르를 후계자로 염두에 두었으나, 결국 루키우스 아일리우스 카이사르를 양자로 삼았다. 이에 불만을 품은 세르비아누스와 살리나토르는 하드리아누스에게 반발했고, 쿠데타를 시도했다는 의혹까지 받아 죽음을 맞이했다.[7]
세르비아누스의 죽음은 로마 제정 시대 권력의 불안정성과 황제 계승 과정의 문제점을 보여준다. 비록 유능한 인물이었지만, 권력 암투 속에서 비극적인 최후를 맞이한 것이다.
참조
[1]
논문
Iterated Consulships and the Government of Severus Alexander
https://www.jstor.or[...]
[2]
서적
Adoptive and Polyonymous Nomenclature in the Roman Empire
Societas Scientiarum Fennica
[3]
논문
Jahres- und Provinzialfasten der senatorischen Statthalter von 69/70 bis 138/139
[4]
기타
Jahres- und Provinzialfasten
[5]
기타
Epistulae
[6]
논문
A Dozen Early Priesthoods
https://www.jstor.or[...]
[7]
서적
Hadrian the Restless Emperor
[8]
논문
Iterated Consulships and the Government of Severus Alexander
https://www.jstor.or[...]
[9]
서적
Adoptive and Polyonymous Nomenclature in the Roman Empire
Societas Scientiarum Fennica
[10]
논문
Jahres- und Provinzialfasten der senatorischen Statthalter von 69/70 bis 138/139
[11]
기타
Jahres- und Provinzialfasten
[12]
기타
Epistulae
[13]
논문
A Dozen Early Priesthoods
https://www.jstor.or[...]
[14]
서적
Hadrian the Restless Empero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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